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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릴게임예시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달리로 만들어 본 맥아더의 초상화. 다면적 인간인 맥아더를 표현하기 위해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 화법으로 맥아더의 얼굴을 나타내 봤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역설적인 인간이었다. 고상하며 비열하고, 오만하면서 수줍고,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가장 좋은 인간인 동시 가장 나쁜 인간이며, 매우 우스꽝스럽고 매우 숭고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전기 ‘아메리칸 시저’(윌리엄 맨체스터 저)는 이렇게 시작한다. 맥아더는 극과 극을 오간 인간이었다. 후대 평가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대 맥아더와 직접 얼굴을 맞댔던 이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릴게임손오공 맥아더를 오랫동안 통찰력 있게 바라본 이들의 평가는 거의 일치한다. 맥아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 실제 맥아더를 만난 사람들의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백인백상(百人百想)이다. 100명이 만났다면, 그 100명이 느낀 생각이 다 제각각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만났는지, 그를 가 야마토게임장 까이서 봤는지 멀리서 목격했는지에 따라 맥아더에 대한 경험담은 천차만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휘하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호주 장군 토머스 블레이미(호주군 첫 원수였던 전쟁영웅)의 평가를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입체적 인간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블레이미는 이렇게 단언했다.
“맥아더에 대 바다신2다운로드 해 당신이 들은 최고의 말과 최악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맥아더는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자 최고로 논쟁적인 장군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장군”(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이란 찬사,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라는 악평, “멍청한 개자식”(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라는 욕설이 모두 공존하고, 이 모든 평가가 다 사실에 근거한다. 심지어 한 사람이 최고-최악 평가를 동시에 했던 경우도 있다. 오랜 기간 맥아더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대통령)는 맥아더를 두고 “최고의 지성인”이라고도 했다가 “어떻게 저런 바보가 장군이 됐는지 궁금하다”고 혹평했다.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
호오가 나뉘는 역사적 인물은 많지만, 맥아더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함께 존재하기 어려워 보이는 ‘양극단 자질’이 맥아더라는 한 인간 안에서 동시에 구현됐기 때문일 것이다. 맥아더는 언제나 똑같이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했음에도, 워낙 다면적이었던 그의 ‘프리즘 같은 성격’은 보는 이마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맥아더라는 인간을 선악이나 흑백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보다는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여러 특성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모아 병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맥아더가 직접 남긴 기록 △맥아더의 생애를 평가한 대표 전기 △당시 미군 기록 △당대와 후대의 언론 기사와 인터뷰 등을 종합해, 맥아더의 12개 범주로 분류해 보았다.
맥아더의 6·25 활약을 살피기 전 그의 성격을 먼저 파악하는 이유가 있다. 맥아더는 그의 동갑내기 라이벌 조지 마셜처럼 ‘시스템’을 통해 일하는 합리적 리더가 아니라, 지성·직감·권위 등 개인적 요소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은(적어도 전쟁 초반부는) 미국 역사가 스탠리 웨인트라웁의 책 이름처럼 ‘맥아더의 전쟁(MacArthur’s War)'이었다.
6·25 전쟁 초반 유엔군 측에 있었던 모든 공과가 사실 맥아더와 관련이 있다. 미군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 판단 실수 때문이었고, 미국 정부가 그렇게 한반도에 빨리 미 전투부대를 파병할 수 있었던 것도 맥아더의 신속한 지상군 투입 요청 덕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맥아더의 개인기로 달성한 전공이고, 유엔군이 중공군 개입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적을 얕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 하는 맥아더의 나쁜 버릇 때문이었다. 그래서 6·25 전쟁을 제대로 알려면 맥아더란 인간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육사 생도 시절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트루먼 도서관
“용감한 자 중에 가장 용감한 자(Le Brave des braves)”
(맥아더 부하들이 라이터에 새겨준 문구. 나폴레옹이 미셸 네 원수에게 붙인 별명이다.)
군대경력: 명예와 오만이 누적된 48년
‘12면체 인간’ 맥아더가 가진 다채로운 특성을 파악하려면, 48년(1903~1951년)에 걸친 그의 긴 군경력을 짧게나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북전쟁 영웅인 군인 아버지, 부유한 면화 중개상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때부터 ‘거의 모든 에이스 카드를 쥐고’(미 전사가 리처드 프랭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육군 주둔지를 따라 다니며 군대에 익숙했던 맥아더는 19세 때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 진학했다.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한 맥아더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7년 소령 맥아더는 대령(임시 전시계급)으로 승진해 유럽 파병을 위해 신설된 무지개사단(전국 주방위군을 모은 부대)의 참모장에 취임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며 1918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 전쟁에서만 수훈십자장 2개, 은성훈장 7개를 받았다. 전쟁 후엔 다시 소령 계급으로 복귀해야 했으나, 육사 교장(준장 보직)으로 발탁되면서 계속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군의 엘리트로 떠오른 맥아더가 다시 빛을 발한 시기는 1930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소장→대장)하면서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아버지(1912년 뇌졸중 급사)가 끝내 오르지 못한 자리였기 때문에, 맥아더 본인과 어머니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진급이었다. 후버(공화당)와 루스벨트(민주당) 두 대통령을 모시며 5년 가까이 참모총장으로 재임한 맥아더는 이 시기 워싱턴 보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동시, 민주당 진보 정권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참모총장 재직 시 맥아더는 1932년 대공황 당시 추가 수당(보너스)을 달라며 수도 워싱턴에 모인 1차대전 참전용사(보너스 아미)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오명을 얻었고, 대공황으로 인한 예산 삭감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결국 1935년엔 필리핀 자치정부(1946년 정식 독립 예정) 대통령 마누엘 케손의 군사고문으로 전보되며, 사실상 ‘뒷방’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계급은 다시 소장으로 내려왔고, 1937년엔 현역에서 물러나며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변방 필리핀에서 군경력을 마무리하는 듯했던 맥아더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 긴장이 고조됐고, 루스벨트는 그해 7월 필리핀 지역 방어를 위해 맥아더를 다시 현역으로 소환한 뒤 미 극동육군사령관에 임명(소장 복귀 하루 만에 중장 진급)했다.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일본군 기습을 받고 필리핀을 내준 뒤 호주까지 후퇴했으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뉴기니섬을 확보한 뒤 이를 발판으로 필리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45년 9월 도쿄만에 정박된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은 장본인이 바로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연합국 11개국 대표)과 미국 극동군사령관(극동 지역 미 육해군 통합사령부)을 겸임하며 일본을 직접 통치했다.
일본 통치기 맥아더는 ‘푸른 눈의 쇼군’으로 불릴 만큼 일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인생이 네 번째로 빛나던 시기다. 일본제국 전쟁범죄자 처단(극동군사재판)을 주도했고, 민주주의 제도 도입, 시장경제 개혁, 평화헌법(전쟁 포기) 도입 등 일본 재설계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
1950년 6월 만 70세 맥아더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일본에서 마무리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열도 바다 건너에서 불의의 전쟁이 발발했고, 한반도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병력이 바로 맥아더 손 안에 있었다. 군생활 48년 차를 맞이한 노장군은 이제 인생에서 다섯 번째로 마지막 빛을 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이력. 박종범 기자
“그에게는 항상 군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너무나 유능하고 확신에 차 있고, 재능이 넘쳐, 직업적인 기능과 책임의 한계 속에 한정돼 있기 어려웠다.”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제1면 낭중지추: 남을 찌르는 송곳
맥아더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평론가는 찾기 어렵다. 군인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자질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갖춘 특별한 인재였다. 일단 문무를 겸비했다. 웨스트포인트 야구팀 대표로 활약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났고, 타고난 분석력과 꾸준한 독서를 통해 빼어난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다. 특히나 역사와 법률에 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말년에 5,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그를 만난 이들이 한결같이 놀라워했던 것은 비상한 기억력이다. 47년 전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옛날에 함께 봤던 복싱 경기에서 어떤 펀치가 오갔는지를 정확히 기억했다. 12년 만에 만난 지인과는 과거 얘기를 나누다가 끊어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재개했다. 40년 전에 우연히 들었던 일본 해안 조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해 참모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전선 가장 앞에서 부하들을 직접 이끈 용장이었다. 1차대전 프랑스 전선에선 철모도 쓰지 않고 개인화기도 없이 승마용 채찍 하나만 든 채 기관총탄이 쏟아지는 참호를 가로질러 돌격부대 선봉에 서곤 했다. 그 용기는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6·25 전쟁 발발 후 첫 한국 시찰에 나선 1950년 6월 29일, 북한군 전투기가 전용기 주변을 날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활주로에서 아직 전투기가 불타고 있던 수원비행장에 착륙을 강행했으며, 이미 함락된 서울 방향으로 북상해 한강 남안 최전방 진지에서 장시간 강 북쪽을 직접 시찰했다. 나중엔 비무장 수송기에 탑승해 압록강 근처를 날며 중공군 진영 위를 직접 정찰했다. 군생활을 통틀어 맥아더가 받은 훈장은 모두 22개로 미국 역사상 최다인데, 그저 그런 군인이었다면 절대 달성할 수 없었을 진기록이다.
제1차대전 참전 시기의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준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저 사람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야. 저 양반 전사만 하지 않으면 출세 좀 할 거야. 자기가 영생을 누릴 줄 아는 모양이지. 우리처럼 철모 쓰는 일이 없어. 참호전에서도 저 모자 그대로라고.”
(1차대전 때 맥아더를 멀리서 마주친 대위의 말)
그럼에도 맥아더는 모든 영역에서 고루 완벽한 ‘정육각형 인재’는 결코 아니었다. 지성, 용기, 직관, 판단력, 리더십에서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지만, 주변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인화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공평무사한 태도로 부하들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했고, 동료 장군들의 능력을 얕보고 무시했다. 그래서 항상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었다. 군사작가 마크 페리는 “맥아더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력자를 공격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며 “존 퍼싱이 아끼는 조지 마셜을 일부러 좌천시키고 퍼싱이 싫어하는 페이턴 마치를 일부러 밀어주는 바람에, 결국 퍼싱은 맥아더의 적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1차대전 유럽 파병 미군 사령관인 퍼싱은 6성장군(대원수) 자리까지 오른 미 육군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결국 맥아더는 극도로 낮은 인화력 때문에 꼭지점 한쪽이 푹 꺼져 유독 예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뾰족한 육각형’ 인재에 머물렀다. 그래서 맥아더 사례에서 낭중지추는 ‘워낙 다재다능해서 언제 어디서도 그 재능이 특출나게 도드라졌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성정이 둥글지 못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어느 조직에서도 파열음을 내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갈등 유발자’로서의 특성도 설명해 준다.
맥아더의 모친 핑키 맥아더. 미 공영방송 PBS
“맥아더의 어머니는 진정한 헬리콥터맘이었다. 헬리콥터라는 장치가 발명되기 수십 년 전부터 그랬다.”
(맥아더 전기 작가 제임스 엘먼)
제2면 마마보이: 거인을 지배한 치맛바람
맥아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모친인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애칭 ‘핑키’)는 요즘 식으로 보자면 지독한 헬리콥터맘이었다. 자녀의 머리 위를 끊임없이 뱅뱅 맴돌며 모든 일에 간섭하는 극성 엄마였다. 아들의 육사 합격을 위해 시아버지 지인이 연방 하원의원으로 있는 지역으로 주소를 옮겼고(미 사관학교 지원엔 연방의원 추천서 필요), 하원의원 추천 경쟁 시험 준비를 위해 밀워키 학교 교장(감독관 중 한 사람)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핑키는 맥아더가 성인이 되어서도 통제를 멈추지 않았다. 맥아더가 육사에 합격하자 아들 기숙사 건물이 바라보이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아들 방 불빛이 언제 꺼지는지 매일 감시했다. 나중에 아들이 장교로 임관한 후 아들 상관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남편(육군 중장 예편)과의 인연을 일깨우거나, 자기 아들이 군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췄는지를 강조했다.
맥아더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치맛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1차대전 기간 중 핑키는 전쟁부 장관 뉴턴 베이커, 유럽 파병군 총사령관 퍼싱에게 청탁 편지 폭탄을 퍼부어 댔다. 아들을 대령에서 준장으로 속히 승진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맥아더는 청탁 없이도 충분히 진급할 만큼 전공이 넘쳐 났기 때문에 준장이 될 수 있었다.
전쟁 후 퍼싱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자 핑키는 다시 편지를 보내 아들의 소장 승진을 요청했다. 퍼싱이 핑키의 줄기찬 요청에 두 손을 들었는지, 청탁과 상관없이 맥아더가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실제로 퍼싱의 참모총장 임기 말에 맥아더는 두 번째 별을 달았다. 사적으론 맥아더에게 연인(맥아더의 첫 부인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을 빼앗겼던 ‘연적’ 퍼싱은 공적으론 맥아더를 승진시키며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이와 달리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맥아더는 퍼싱이 아끼는 수제자(마셜)에게 인사로 물을 먹이거나 퍼싱이 가장 싫어하는 퇴역장군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등 쓸데없이 퍼싱을 자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유럽 파병 미군총사령관 존 퍼싱 장군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수훈십자장을 수여하고 있다. 미 육군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 제1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2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3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
아들 상관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승진을 요구할 정도였으니, 핑키가 아들 연애 문제를 통제하려고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착실한 아들이 딱 한 번 어머니 뜻을 거스른 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맥아더의 첫 결혼이다. 핑키는 아들이 배필로 선택한 브룩스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혼녀 브룩스는 워싱턴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브룩스는 홀아비(퍼싱), 기혼남(영국 제독), 총각(미군 대령)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퍼싱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미시즈 퍼싱’이 될 것 같았으나, 결국 1922년 퍼싱(62세) 대신 젊은 장군 맥아더(42세)를 택했다. 핑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아들 부부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어머니 축복을 받지 못했던 맥아더의 첫 결혼은 7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혼 후에 모자는 화해했다. 1930년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자, 핑키는 아들을 따라 총장 공관(알링턴 국립묘지 옆 포트 마이어)에 입주했다. 1935년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지명됐을 때도, 83세 핑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따라 마닐라로 이사했다. 그리고 도착 5주 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맥아더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은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위대한 장군의 생애를 살피면서 굳이 그 어머니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맥아더를 조롱하거나 폄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맥아더의 이중적 성격이 바로 어머니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맨체스터의 묘사를 보면 맥아더의 성격은 핑키의 복사판이었다. 맨체스터는 “온화하면서 모질고, 성마르면서 감성적이고, 매력적이면서 감정적이었다”고 핑키의 성품을 기록했다.
핑키는 아들에게 복합적인 성격만 물려준 게 아니었다. 현대의 심리학 연구들을 참조하면 맥아더의 여러 성격적 결함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간섭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부모의 지나친 통제를 받는 자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대인 관계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비판에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실패의 책임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맥아더의 성격적 특성들과 거의 일치하는 증상이다.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아서 맥아더(맥아더 부친)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단 그의 아들 더글러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미 육군 법무감을 지낸 에녹 크라우더 소장)
제3면 유아독존: 통제받지 않은 제왕
복잡한 인간 맥아더의 성격을 감싼 열두 개 면 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그의 드높은 자존감이다. 출신·능력·성과·평판 등을 보면 그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로버트 E. 리(남군 명장) 이후 최고의 육사 졸업 점수, 38세 장성 진급, 30대 육사 교장, 역대 두 번째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취임(최연소 레너드 우드) 등 육군의 온갖 기록을 독차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자신과 자존이 지나쳐 오만과 자만의 영역으로 너무나 깊게 들어가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성향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발현되었는지, 육사 시절 동기 생도 중 한 사람은 “맥아더는 여덟 살 때부터 오만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의 자만은 화법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맥아더는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화법을 일리이즘(Illeism)이라고 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스스로를 ‘카이사르’라고 적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맥아더의 이 버릇은 이미 30대 때 시작됐다. 오랫동안 부관으로 맥아더를 보좌한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맥아더가 자신을 일컫는 방식은 이랬다. 참모총장 시절 의사당을 다녀온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보더니 “맥아더가 그 상원의원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지”라며 마치 남 얘기를 하듯 스스로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패션이다. 그는 애초 육군의 복장 규정 따위는 지킬 생각이 없었다. 1차대전 참전 당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참호전에서도 절대 철모를 쓰는 일이 없었고, 총 대신 채찍 하나만 들고 최전선을 누볐다. 보급 외투 대신 화려한 모피 코트를 입었고, 그 모피 코트 위에 어머니가 직접 짜 준 대형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철모 대신 찌그러진 군모를 썼고, 허벅지가 잔뜩 부푼 승마바지를 입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복장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날씨가 추울 때 그는 보급 외투를 입지 않고 모피 코트를 입고 어머니가 짜 준 목도리를 둘렀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가 연극무대에 섰더라면 존 배리모어(초기 할리우드 최고 배우)는 그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 관여한 미 해군 제독 제임스 도일)
맥아더를 보통 ‘원수(5성장군)'라는 계급으로 부르는데, 그는 미국과 필리핀 양국에서 원수 계급을 받은 특이한 이력을 자랑한다.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된 것은 1944년, 필리핀군 원수(Field Marshal)가 된 것은 1936년으로 오히려 필리핀 쪽이 8년 빠르다. 미군 현역 소장의 신분(1937년 1차 예편)으로 필리핀 장군 계급을 받은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맥아더에게 자국군 계급을 수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당시 참모장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맥아더가 케손에게 먼저 원수직을 요청했다고 한다. 필리핀 원수로 임명될 때 스스로 모자를 디자인했는데, 이게 바로 맥아더가 계속 쓰고 다녔던 그 화려한 금테 군모다.
맥아더의 못 말리는 허영심을 보여주는 ‘필리핀 원수’ 일화는 훗날 아이젠하워를 통해 알려졌다. 이것 말고도 아이젠하워가 꽤나 많은 맥아더의 치부를 공개한 것을 보면, 맥아더는 가까운 부하들 사이에서 별로 인망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맥아더는 자만에 눈이 멀어, 정무감각이 남달랐던 아이젠하워의 충언을 여러 차례 무시하다가 곤경에 빠지곤 했다. 참모총장 재직 시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 맥아더는 “몸소 나서지 마시라”는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하고 현장에서 참전 용사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다 뒤집어 썼다. 나중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재직할 때는 “워싱턴으로 가서 정부·의회 사람들을 만나 자금과 무기를 받아 오셔야 한다”는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했다.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부탁이란 걸 할 줄 몰랐던 맥아더는 결국 필리핀에서 일본군 기습에 밀려 호주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발발 후엔 필리핀 대신 워싱턴 근무를 자원했고, 맥아더 그늘을 벗어난 뒤부터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며 쾌속 승진 끝에 1944년 맥아더와 같은 계급(원수)까지 올랐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맥아더는 종군기자들을 상대로 철저한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전쟁 중 언론 기사를 통제하거나 종군기자의 동선에 간섭한 것은 다른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맥아더 사령부의 언론 통제는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로 맥아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종군기자들은 모든 전투에 다 따라갈 수 없으니 사령부가 내는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맥아더 공보참모들은 사실을 조작해 ‘맥아더가 현장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한 것처럼 보이도록’ 문장을 다듬었다.
승마바지를 입은 더글러스 맥아더. 1930년대초 육군참모총장 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허벅지 쪽이 펑퍼짐한 조드퍼스(Jodhpurs) 스타일의 승마바지를 입고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는 대부분 ‘장군이 적보다 한 수 앞선 지략으로 적의 의표를 찔러 승리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젠하워가 총사령관이었던 유럽 전선에선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등 다양한 장군들의 활약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전선에선 오직 맥아더 혼자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라도 언론이 자신의 부하 장군을 조명하면, 그 장군에겐 맥아더의 철저한 견제가 뒤따랐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무찌른 로버트 아이첼버거 소장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불러 “자네를 당장 대령으로 강등시켜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기 외의 그 누구도 전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리처드 로베르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아서 슐레진저는 이를 두고 “맥아더는 전쟁의 환상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가 평시에도 자신과 관련한 비판 보도를 원천적으로 막았던 사례가 있다. 일본 패망 후 맥아더의 연합군 사령부가 1945년 9월 19일 포고한 10개 항의 언론 규정(press code) 중에는 ‘연합군 주둔에 관한 치명적인 비판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본에선 ‘연합군’이 ‘맥아더’와 동의어였기 때문에, 이것은 맥아더 체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가벼운 지적도 맥아더는 참지 못했다. 1944년 7월 일본 본토 공략을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고위 지휘관을 모두 하와이로 소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에게 “뉴기니에서 미군 피해가 너무 많았던 것 아니오”라고 말하자, 맥아더는 곧장 대통령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누가 그런 정보를 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누구든 그는 대통령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이 말을 할 때 맥아더는 강조의 의미로 손가락을 펴 대통령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행동까지 했다고 한다. 위스콘신 주지사를 역임한 후 군에 입대해 2차대전 중 맥아더 사령부 공보장교로 일한 필립 라폴레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미 맥아더의 자아는 임명권자의 작은 비판조차 수용하지 못할 만큼 완고하고 경직돼 있었다. 대통령 몸에 손을 대는 일조차 서슴지 않을 정도로, 독선은 심각했다.
※ 맥아더의 명령불복, 피해의식, 확증편향을 다룬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2월 9일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맥아더가 보여 준 12가지 특성. 박종범 기자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릴게임예시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달리로 만들어 본 맥아더의 초상화. 다면적 인간인 맥아더를 표현하기 위해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 화법으로 맥아더의 얼굴을 나타내 봤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역설적인 인간이었다. 고상하며 비열하고, 오만하면서 수줍고,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가장 좋은 인간인 동시 가장 나쁜 인간이며, 매우 우스꽝스럽고 매우 숭고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전기 ‘아메리칸 시저’(윌리엄 맨체스터 저)는 이렇게 시작한다. 맥아더는 극과 극을 오간 인간이었다. 후대 평가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대 맥아더와 직접 얼굴을 맞댔던 이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릴게임손오공 맥아더를 오랫동안 통찰력 있게 바라본 이들의 평가는 거의 일치한다. 맥아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 실제 맥아더를 만난 사람들의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백인백상(百人百想)이다. 100명이 만났다면, 그 100명이 느낀 생각이 다 제각각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만났는지, 그를 가 야마토게임장 까이서 봤는지 멀리서 목격했는지에 따라 맥아더에 대한 경험담은 천차만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휘하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호주 장군 토머스 블레이미(호주군 첫 원수였던 전쟁영웅)의 평가를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입체적 인간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블레이미는 이렇게 단언했다.
“맥아더에 대 바다신2다운로드 해 당신이 들은 최고의 말과 최악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맥아더는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자 최고로 논쟁적인 장군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장군”(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이란 찬사,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라는 악평, “멍청한 개자식”(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라는 욕설이 모두 공존하고, 이 모든 평가가 다 사실에 근거한다. 심지어 한 사람이 최고-최악 평가를 동시에 했던 경우도 있다. 오랜 기간 맥아더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대통령)는 맥아더를 두고 “최고의 지성인”이라고도 했다가 “어떻게 저런 바보가 장군이 됐는지 궁금하다”고 혹평했다.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
호오가 나뉘는 역사적 인물은 많지만, 맥아더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함께 존재하기 어려워 보이는 ‘양극단 자질’이 맥아더라는 한 인간 안에서 동시에 구현됐기 때문일 것이다. 맥아더는 언제나 똑같이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했음에도, 워낙 다면적이었던 그의 ‘프리즘 같은 성격’은 보는 이마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맥아더라는 인간을 선악이나 흑백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보다는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여러 특성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모아 병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맥아더가 직접 남긴 기록 △맥아더의 생애를 평가한 대표 전기 △당시 미군 기록 △당대와 후대의 언론 기사와 인터뷰 등을 종합해, 맥아더의 12개 범주로 분류해 보았다.
맥아더의 6·25 활약을 살피기 전 그의 성격을 먼저 파악하는 이유가 있다. 맥아더는 그의 동갑내기 라이벌 조지 마셜처럼 ‘시스템’을 통해 일하는 합리적 리더가 아니라, 지성·직감·권위 등 개인적 요소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은(적어도 전쟁 초반부는) 미국 역사가 스탠리 웨인트라웁의 책 이름처럼 ‘맥아더의 전쟁(MacArthur’s War)'이었다.
6·25 전쟁 초반 유엔군 측에 있었던 모든 공과가 사실 맥아더와 관련이 있다. 미군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 판단 실수 때문이었고, 미국 정부가 그렇게 한반도에 빨리 미 전투부대를 파병할 수 있었던 것도 맥아더의 신속한 지상군 투입 요청 덕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맥아더의 개인기로 달성한 전공이고, 유엔군이 중공군 개입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적을 얕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 하는 맥아더의 나쁜 버릇 때문이었다. 그래서 6·25 전쟁을 제대로 알려면 맥아더란 인간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육사 생도 시절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트루먼 도서관
“용감한 자 중에 가장 용감한 자(Le Brave des braves)”
(맥아더 부하들이 라이터에 새겨준 문구. 나폴레옹이 미셸 네 원수에게 붙인 별명이다.)
군대경력: 명예와 오만이 누적된 48년
‘12면체 인간’ 맥아더가 가진 다채로운 특성을 파악하려면, 48년(1903~1951년)에 걸친 그의 긴 군경력을 짧게나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북전쟁 영웅인 군인 아버지, 부유한 면화 중개상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때부터 ‘거의 모든 에이스 카드를 쥐고’(미 전사가 리처드 프랭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육군 주둔지를 따라 다니며 군대에 익숙했던 맥아더는 19세 때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 진학했다.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한 맥아더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7년 소령 맥아더는 대령(임시 전시계급)으로 승진해 유럽 파병을 위해 신설된 무지개사단(전국 주방위군을 모은 부대)의 참모장에 취임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며 1918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 전쟁에서만 수훈십자장 2개, 은성훈장 7개를 받았다. 전쟁 후엔 다시 소령 계급으로 복귀해야 했으나, 육사 교장(준장 보직)으로 발탁되면서 계속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군의 엘리트로 떠오른 맥아더가 다시 빛을 발한 시기는 1930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소장→대장)하면서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아버지(1912년 뇌졸중 급사)가 끝내 오르지 못한 자리였기 때문에, 맥아더 본인과 어머니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진급이었다. 후버(공화당)와 루스벨트(민주당) 두 대통령을 모시며 5년 가까이 참모총장으로 재임한 맥아더는 이 시기 워싱턴 보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동시, 민주당 진보 정권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참모총장 재직 시 맥아더는 1932년 대공황 당시 추가 수당(보너스)을 달라며 수도 워싱턴에 모인 1차대전 참전용사(보너스 아미)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오명을 얻었고, 대공황으로 인한 예산 삭감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결국 1935년엔 필리핀 자치정부(1946년 정식 독립 예정) 대통령 마누엘 케손의 군사고문으로 전보되며, 사실상 ‘뒷방’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계급은 다시 소장으로 내려왔고, 1937년엔 현역에서 물러나며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변방 필리핀에서 군경력을 마무리하는 듯했던 맥아더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 긴장이 고조됐고, 루스벨트는 그해 7월 필리핀 지역 방어를 위해 맥아더를 다시 현역으로 소환한 뒤 미 극동육군사령관에 임명(소장 복귀 하루 만에 중장 진급)했다.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일본군 기습을 받고 필리핀을 내준 뒤 호주까지 후퇴했으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뉴기니섬을 확보한 뒤 이를 발판으로 필리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45년 9월 도쿄만에 정박된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은 장본인이 바로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연합국 11개국 대표)과 미국 극동군사령관(극동 지역 미 육해군 통합사령부)을 겸임하며 일본을 직접 통치했다.
일본 통치기 맥아더는 ‘푸른 눈의 쇼군’으로 불릴 만큼 일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인생이 네 번째로 빛나던 시기다. 일본제국 전쟁범죄자 처단(극동군사재판)을 주도했고, 민주주의 제도 도입, 시장경제 개혁, 평화헌법(전쟁 포기) 도입 등 일본 재설계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
1950년 6월 만 70세 맥아더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일본에서 마무리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열도 바다 건너에서 불의의 전쟁이 발발했고, 한반도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병력이 바로 맥아더 손 안에 있었다. 군생활 48년 차를 맞이한 노장군은 이제 인생에서 다섯 번째로 마지막 빛을 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이력. 박종범 기자
“그에게는 항상 군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너무나 유능하고 확신에 차 있고, 재능이 넘쳐, 직업적인 기능과 책임의 한계 속에 한정돼 있기 어려웠다.”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제1면 낭중지추: 남을 찌르는 송곳
맥아더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평론가는 찾기 어렵다. 군인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자질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갖춘 특별한 인재였다. 일단 문무를 겸비했다. 웨스트포인트 야구팀 대표로 활약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났고, 타고난 분석력과 꾸준한 독서를 통해 빼어난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다. 특히나 역사와 법률에 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말년에 5,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그를 만난 이들이 한결같이 놀라워했던 것은 비상한 기억력이다. 47년 전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옛날에 함께 봤던 복싱 경기에서 어떤 펀치가 오갔는지를 정확히 기억했다. 12년 만에 만난 지인과는 과거 얘기를 나누다가 끊어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재개했다. 40년 전에 우연히 들었던 일본 해안 조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해 참모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전선 가장 앞에서 부하들을 직접 이끈 용장이었다. 1차대전 프랑스 전선에선 철모도 쓰지 않고 개인화기도 없이 승마용 채찍 하나만 든 채 기관총탄이 쏟아지는 참호를 가로질러 돌격부대 선봉에 서곤 했다. 그 용기는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6·25 전쟁 발발 후 첫 한국 시찰에 나선 1950년 6월 29일, 북한군 전투기가 전용기 주변을 날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활주로에서 아직 전투기가 불타고 있던 수원비행장에 착륙을 강행했으며, 이미 함락된 서울 방향으로 북상해 한강 남안 최전방 진지에서 장시간 강 북쪽을 직접 시찰했다. 나중엔 비무장 수송기에 탑승해 압록강 근처를 날며 중공군 진영 위를 직접 정찰했다. 군생활을 통틀어 맥아더가 받은 훈장은 모두 22개로 미국 역사상 최다인데, 그저 그런 군인이었다면 절대 달성할 수 없었을 진기록이다.
제1차대전 참전 시기의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준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저 사람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야. 저 양반 전사만 하지 않으면 출세 좀 할 거야. 자기가 영생을 누릴 줄 아는 모양이지. 우리처럼 철모 쓰는 일이 없어. 참호전에서도 저 모자 그대로라고.”
(1차대전 때 맥아더를 멀리서 마주친 대위의 말)
그럼에도 맥아더는 모든 영역에서 고루 완벽한 ‘정육각형 인재’는 결코 아니었다. 지성, 용기, 직관, 판단력, 리더십에서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지만, 주변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인화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공평무사한 태도로 부하들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했고, 동료 장군들의 능력을 얕보고 무시했다. 그래서 항상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었다. 군사작가 마크 페리는 “맥아더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력자를 공격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며 “존 퍼싱이 아끼는 조지 마셜을 일부러 좌천시키고 퍼싱이 싫어하는 페이턴 마치를 일부러 밀어주는 바람에, 결국 퍼싱은 맥아더의 적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1차대전 유럽 파병 미군 사령관인 퍼싱은 6성장군(대원수) 자리까지 오른 미 육군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결국 맥아더는 극도로 낮은 인화력 때문에 꼭지점 한쪽이 푹 꺼져 유독 예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뾰족한 육각형’ 인재에 머물렀다. 그래서 맥아더 사례에서 낭중지추는 ‘워낙 다재다능해서 언제 어디서도 그 재능이 특출나게 도드라졌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성정이 둥글지 못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어느 조직에서도 파열음을 내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갈등 유발자’로서의 특성도 설명해 준다.
맥아더의 모친 핑키 맥아더. 미 공영방송 PBS
“맥아더의 어머니는 진정한 헬리콥터맘이었다. 헬리콥터라는 장치가 발명되기 수십 년 전부터 그랬다.”
(맥아더 전기 작가 제임스 엘먼)
제2면 마마보이: 거인을 지배한 치맛바람
맥아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모친인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애칭 ‘핑키’)는 요즘 식으로 보자면 지독한 헬리콥터맘이었다. 자녀의 머리 위를 끊임없이 뱅뱅 맴돌며 모든 일에 간섭하는 극성 엄마였다. 아들의 육사 합격을 위해 시아버지 지인이 연방 하원의원으로 있는 지역으로 주소를 옮겼고(미 사관학교 지원엔 연방의원 추천서 필요), 하원의원 추천 경쟁 시험 준비를 위해 밀워키 학교 교장(감독관 중 한 사람)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핑키는 맥아더가 성인이 되어서도 통제를 멈추지 않았다. 맥아더가 육사에 합격하자 아들 기숙사 건물이 바라보이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아들 방 불빛이 언제 꺼지는지 매일 감시했다. 나중에 아들이 장교로 임관한 후 아들 상관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남편(육군 중장 예편)과의 인연을 일깨우거나, 자기 아들이 군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췄는지를 강조했다.
맥아더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치맛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1차대전 기간 중 핑키는 전쟁부 장관 뉴턴 베이커, 유럽 파병군 총사령관 퍼싱에게 청탁 편지 폭탄을 퍼부어 댔다. 아들을 대령에서 준장으로 속히 승진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맥아더는 청탁 없이도 충분히 진급할 만큼 전공이 넘쳐 났기 때문에 준장이 될 수 있었다.
전쟁 후 퍼싱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자 핑키는 다시 편지를 보내 아들의 소장 승진을 요청했다. 퍼싱이 핑키의 줄기찬 요청에 두 손을 들었는지, 청탁과 상관없이 맥아더가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실제로 퍼싱의 참모총장 임기 말에 맥아더는 두 번째 별을 달았다. 사적으론 맥아더에게 연인(맥아더의 첫 부인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을 빼앗겼던 ‘연적’ 퍼싱은 공적으론 맥아더를 승진시키며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이와 달리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맥아더는 퍼싱이 아끼는 수제자(마셜)에게 인사로 물을 먹이거나 퍼싱이 가장 싫어하는 퇴역장군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등 쓸데없이 퍼싱을 자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유럽 파병 미군총사령관 존 퍼싱 장군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수훈십자장을 수여하고 있다. 미 육군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 제1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2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3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
아들 상관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승진을 요구할 정도였으니, 핑키가 아들 연애 문제를 통제하려고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착실한 아들이 딱 한 번 어머니 뜻을 거스른 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맥아더의 첫 결혼이다. 핑키는 아들이 배필로 선택한 브룩스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혼녀 브룩스는 워싱턴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브룩스는 홀아비(퍼싱), 기혼남(영국 제독), 총각(미군 대령)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퍼싱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미시즈 퍼싱’이 될 것 같았으나, 결국 1922년 퍼싱(62세) 대신 젊은 장군 맥아더(42세)를 택했다. 핑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아들 부부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어머니 축복을 받지 못했던 맥아더의 첫 결혼은 7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혼 후에 모자는 화해했다. 1930년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자, 핑키는 아들을 따라 총장 공관(알링턴 국립묘지 옆 포트 마이어)에 입주했다. 1935년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지명됐을 때도, 83세 핑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따라 마닐라로 이사했다. 그리고 도착 5주 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맥아더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은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위대한 장군의 생애를 살피면서 굳이 그 어머니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맥아더를 조롱하거나 폄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맥아더의 이중적 성격이 바로 어머니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맨체스터의 묘사를 보면 맥아더의 성격은 핑키의 복사판이었다. 맨체스터는 “온화하면서 모질고, 성마르면서 감성적이고, 매력적이면서 감정적이었다”고 핑키의 성품을 기록했다.
핑키는 아들에게 복합적인 성격만 물려준 게 아니었다. 현대의 심리학 연구들을 참조하면 맥아더의 여러 성격적 결함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간섭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부모의 지나친 통제를 받는 자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대인 관계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비판에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실패의 책임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맥아더의 성격적 특성들과 거의 일치하는 증상이다.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아서 맥아더(맥아더 부친)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단 그의 아들 더글러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미 육군 법무감을 지낸 에녹 크라우더 소장)
제3면 유아독존: 통제받지 않은 제왕
복잡한 인간 맥아더의 성격을 감싼 열두 개 면 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그의 드높은 자존감이다. 출신·능력·성과·평판 등을 보면 그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로버트 E. 리(남군 명장) 이후 최고의 육사 졸업 점수, 38세 장성 진급, 30대 육사 교장, 역대 두 번째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취임(최연소 레너드 우드) 등 육군의 온갖 기록을 독차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자신과 자존이 지나쳐 오만과 자만의 영역으로 너무나 깊게 들어가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성향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발현되었는지, 육사 시절 동기 생도 중 한 사람은 “맥아더는 여덟 살 때부터 오만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의 자만은 화법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맥아더는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화법을 일리이즘(Illeism)이라고 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스스로를 ‘카이사르’라고 적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맥아더의 이 버릇은 이미 30대 때 시작됐다. 오랫동안 부관으로 맥아더를 보좌한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맥아더가 자신을 일컫는 방식은 이랬다. 참모총장 시절 의사당을 다녀온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보더니 “맥아더가 그 상원의원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지”라며 마치 남 얘기를 하듯 스스로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패션이다. 그는 애초 육군의 복장 규정 따위는 지킬 생각이 없었다. 1차대전 참전 당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참호전에서도 절대 철모를 쓰는 일이 없었고, 총 대신 채찍 하나만 들고 최전선을 누볐다. 보급 외투 대신 화려한 모피 코트를 입었고, 그 모피 코트 위에 어머니가 직접 짜 준 대형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철모 대신 찌그러진 군모를 썼고, 허벅지가 잔뜩 부푼 승마바지를 입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복장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날씨가 추울 때 그는 보급 외투를 입지 않고 모피 코트를 입고 어머니가 짜 준 목도리를 둘렀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가 연극무대에 섰더라면 존 배리모어(초기 할리우드 최고 배우)는 그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 관여한 미 해군 제독 제임스 도일)
맥아더를 보통 ‘원수(5성장군)'라는 계급으로 부르는데, 그는 미국과 필리핀 양국에서 원수 계급을 받은 특이한 이력을 자랑한다.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된 것은 1944년, 필리핀군 원수(Field Marshal)가 된 것은 1936년으로 오히려 필리핀 쪽이 8년 빠르다. 미군 현역 소장의 신분(1937년 1차 예편)으로 필리핀 장군 계급을 받은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맥아더에게 자국군 계급을 수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당시 참모장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맥아더가 케손에게 먼저 원수직을 요청했다고 한다. 필리핀 원수로 임명될 때 스스로 모자를 디자인했는데, 이게 바로 맥아더가 계속 쓰고 다녔던 그 화려한 금테 군모다.
맥아더의 못 말리는 허영심을 보여주는 ‘필리핀 원수’ 일화는 훗날 아이젠하워를 통해 알려졌다. 이것 말고도 아이젠하워가 꽤나 많은 맥아더의 치부를 공개한 것을 보면, 맥아더는 가까운 부하들 사이에서 별로 인망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맥아더는 자만에 눈이 멀어, 정무감각이 남달랐던 아이젠하워의 충언을 여러 차례 무시하다가 곤경에 빠지곤 했다. 참모총장 재직 시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 맥아더는 “몸소 나서지 마시라”는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하고 현장에서 참전 용사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다 뒤집어 썼다. 나중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재직할 때는 “워싱턴으로 가서 정부·의회 사람들을 만나 자금과 무기를 받아 오셔야 한다”는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했다.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부탁이란 걸 할 줄 몰랐던 맥아더는 결국 필리핀에서 일본군 기습에 밀려 호주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발발 후엔 필리핀 대신 워싱턴 근무를 자원했고, 맥아더 그늘을 벗어난 뒤부터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며 쾌속 승진 끝에 1944년 맥아더와 같은 계급(원수)까지 올랐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맥아더는 종군기자들을 상대로 철저한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전쟁 중 언론 기사를 통제하거나 종군기자의 동선에 간섭한 것은 다른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맥아더 사령부의 언론 통제는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로 맥아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종군기자들은 모든 전투에 다 따라갈 수 없으니 사령부가 내는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맥아더 공보참모들은 사실을 조작해 ‘맥아더가 현장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한 것처럼 보이도록’ 문장을 다듬었다.
승마바지를 입은 더글러스 맥아더. 1930년대초 육군참모총장 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허벅지 쪽이 펑퍼짐한 조드퍼스(Jodhpurs) 스타일의 승마바지를 입고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는 대부분 ‘장군이 적보다 한 수 앞선 지략으로 적의 의표를 찔러 승리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젠하워가 총사령관이었던 유럽 전선에선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등 다양한 장군들의 활약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전선에선 오직 맥아더 혼자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라도 언론이 자신의 부하 장군을 조명하면, 그 장군에겐 맥아더의 철저한 견제가 뒤따랐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무찌른 로버트 아이첼버거 소장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불러 “자네를 당장 대령으로 강등시켜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기 외의 그 누구도 전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리처드 로베르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아서 슐레진저는 이를 두고 “맥아더는 전쟁의 환상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가 평시에도 자신과 관련한 비판 보도를 원천적으로 막았던 사례가 있다. 일본 패망 후 맥아더의 연합군 사령부가 1945년 9월 19일 포고한 10개 항의 언론 규정(press code) 중에는 ‘연합군 주둔에 관한 치명적인 비판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본에선 ‘연합군’이 ‘맥아더’와 동의어였기 때문에, 이것은 맥아더 체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가벼운 지적도 맥아더는 참지 못했다. 1944년 7월 일본 본토 공략을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고위 지휘관을 모두 하와이로 소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에게 “뉴기니에서 미군 피해가 너무 많았던 것 아니오”라고 말하자, 맥아더는 곧장 대통령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누가 그런 정보를 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누구든 그는 대통령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이 말을 할 때 맥아더는 강조의 의미로 손가락을 펴 대통령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행동까지 했다고 한다. 위스콘신 주지사를 역임한 후 군에 입대해 2차대전 중 맥아더 사령부 공보장교로 일한 필립 라폴레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미 맥아더의 자아는 임명권자의 작은 비판조차 수용하지 못할 만큼 완고하고 경직돼 있었다. 대통령 몸에 손을 대는 일조차 서슴지 않을 정도로, 독선은 심각했다.
※ 맥아더의 명령불복, 피해의식, 확증편향을 다룬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2월 9일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맥아더가 보여 준 12가지 특성. 박종범 기자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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