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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전투와 인조반정의 주역들
김정탁 노장사상가
충주에 가면 탄금대(彈琴臺)가 있다. 이곳은 송림으로 뒤덮인 기암절벽인데 남한강이 휘감으면서 흘러 경치가 빼어나다. 신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진흥왕 시절 여기서 조국 가야를 그리워하며 가야금을 연주하자 오묘한 음률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가야금(琴)을 뜯는(彈) 대로 명명되었 바다이야기프로그램 다. 그러니 가야인에게는 망국의 한이 서린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이 총력을 기울여 일본군의 북상을 여기서 저지코자 했으나 오히려 궤멸돼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는 빌미를 제공해 조선인에게는 한 많은 장소로 기억된다.
■
「 명·청 등거리 외교 등에 대한 불만 정변 명분 약해, 정치로 풀었어야 릴게임황금성
인조, 삼전도 굴욕 후 ‘친청’ 기울어 이괄 등 반란 주역, 또 반란 일으켜
권력에서 소외된 서인들의 반역 집권 후 예학 강조, 민간 활력 잃어 」
왜군에 패한 신립, 탄금대에서 몸 던져
탄금대의 열두대. 우 바다신게임 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탄금대 전투를 두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여전하다. 신립 원수가 탄금대 앞 달천평야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고 근처 조령의 길목을 지켰더라면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 때문이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후에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조령을 둘러보고 어째서 조령을 포기하고 허허벌판에서 싸웠는지 의아해했다. 신립은 자신의 장기인 기병전을 벌이기 위해 부원수 김여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를 배수진 삼아 달천평야에서 일전을 벌이다가 참패를 당했다. 결국에 두 사람은 탄금대에서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들의 아들 신경진(申景禛)과 김류(金瑬)는 30년 후에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역사의 무대에 화 손오공릴게임 려하게 등장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등극했는데 이때 반정 주역들이 내세운 명분은 선조의 젊은 계비 인목왕후의 폐모와 명·청 등거리외교에 대한 불만인데 이것들은 엄밀히 말해 왕을 폐위시킬만한 사안이 아니다. 이 정도의 반정 명분이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야당의 연이은 탄핵 공세로 계엄령을 발동했다는 주장과 어쩌면 흡사하다. 정치력으로 풀어야 할 사안을 무력으로 해결해서다. 게다가 폐모론을 주도한 사람은 광해군이 아니라 권신 이이첨인데 설령 광해군이 방관했다 해도 이이첨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지 이를 이유로 왕을 폐위시킨 건 누가 뭐라 해도 불충한 일이다.
탄금대의 탄금정. [사진 김정탁]
또 반정 세력들은 명·청 등거리외교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린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명이 기울고 후금이 강해지는 마당에선 광해군의 국제정세관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 때 명의 참전은 조선만 구한다기보다는 명이 일본과의 전쟁을 조선에서 벌인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궁극적인 목표가 조선을 거쳐서 명을 쳐 중국을 일본에 복속시키는 일이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한 대안도 없이 친명배금(親明拜金)의 기치를 내걸고 반정을 일으켰으니 결국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니 인조반정은 무엇보다 명분에서 약했다. 명분이 얼마나 약했는지는 반정 일등공신인 이서(李曙)의 회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접한 나라 사람들이 새 임금에게 성덕이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해 반정 주역들의 상하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더라도 반정의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마당에 이들을 위세로 누를 수 없어 전 왕조 때의 원로인 이원익을 영상에 제수하자 백성들이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런 분위기 탓이었는지 광해군 시절 폐모론에 반대해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은 유몽인(柳夢寅)도 광해군의 복위를 꾀했다. 그래서 강화도에 유배된 폐세자를 찾아가 복귀를 시도했는데 발각돼서 처형당했다. 유몽인은 선조 시절 장원급제한 인물로 설화문학의 대가이자 『어우야담』의 저자로 유명한데 김시습이 설악산이라면 그는 금강산에 비유될 정도로 노장사상의 추종자다. 그런데도 왕에 대한 충(忠)을 행동으로 보여줬으니 충을 지고지순의 교리로 받든 당시의 성리학자들보다 언행일치에서 훨씬 모범을 보였다.
탄금대를 휘감으며 흐르는 남한강. 조선 장수 신립이 달천평야 전투에서 왜군에 패한 후 탄금대에서 몸을 던졌다. [사진 김정탁]
반면에 반정 주역들은 명분보다도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반정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후 이들의 행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먼저 인조 자신이 그러하다. 인조는 반정 주역들과 직접 반정을 모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왕으로 추대된 중종과는 입장이 크게 다르다. 그런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를 당하는 굴욕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는 자진해서 청나라로 기울었으니 이는 반정의 명분은 내팽개쳐도 왕위는 보존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조는 죽을 때까지 친청파의 좌장인 김자점(金自點)에게 권력을 10년 가까이 몰아줘 왕권을 유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인조는 청에 배신당할까 봐 순치제의 섭정왕인 도르곤의 신뢰를 받던 왕세자 소현세자와 그 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자신의 왕 자리를 대신할까 늘 걱정이었는데 권좌 유지를 위해 맏아들과 맏며느리를 죽게 하고 맏손자까지 죽게 했으니 가정적으로 가장 불행한 왕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친명배금의 명분은 놓고 싶지 않아 왕위를 이은 봉림대군에게 이 숙제를 맡겨 효종은 집권 내내 마음에 내키지 않는 북벌을 외쳐야 했다.
최명길·장유·이귀, 실리 외교 주장
우륵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뜯었다는 이야기를 알리는 표지석. [사진 김정탁]
물론 반정 주역들 가운데는 청의 부상을 현실로 인정해 친명배금의 명분을 접고 실리적 외교를 편 이도 있다. 최명길·장유·이귀 등인데 그렇더라도 반정을 주도한 사람으로 인조반정 때 보인 잘못된 판단과 행동에 대한 사과는 있어야 했다. 최명길은 청과의 화의를 주장해 백성을 구하고자 애썼으나 유생들로부터 매국노라 지탄받아 만년이 불우했다. 장유는 왕을 쫓아낸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우의정에 임명돼도 오르지 않았는데 막상 며느리가 청에 끌려가 환향녀가 돼서 귀국하자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이기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귀는 김류를 늘 경쟁 상대로 여겼으니 함께 목숨 건 반정 동지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한편 반정 주역 중에 다시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셋이나 된다. 이괄·심기원·김자점이다. 이괄은 인조반정 성공 후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서 한양을 점령했는데 서대문 밖 안산에서 패해 부하들에게 목이 잘렸다. 심기원은 회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다가 김자점의 고발로 체포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김자점도 효종 때 유생들로부터 지탄받아 유배됐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탄로가 나 똑같이 능지처참을 당했다.
열두대에서 신립 장군이 몸을 던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김정탁]
그렇다면 나머지 반정 주역들은 괜찮았을까
탄금대에서 바라다보이는 먼 산에 조령이 있다. [사진 김정탁]
? 김류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반정을 일으킬 때 군 병력 출동을 책임졌음에도 몸을 사려 한동안 나타나지 않자 이괄이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데도 반정 후에 이괄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 다시 난을 일으키자 김류는 김자점과 함께 감옥에 갇힌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이 이괄 세력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인조에게 주살할 것을 청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게다가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반정 후에 아버지 덕으로 고속 승진해 병자호란 때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는데 방비를 허술히 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돼 사약을 받았다. 그는 평소에도 행실이 좋지 못해 태형을 자주 받았는데 사사 당하기 직전 아버지 김류에게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애원해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과 비교돼 이 집안은 한동안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권세는 누렸는지 모르지만 행복하진 못했다. 그러니 탄금대에서 몸을 던진 신립과 김여물이 차라리 삶을 깨끗이 마무리했다. 서인의 권력 독점, 조선말까지 계속돼 반정은 바른(正) 상태로 돌아가는(反) 일인데 인조반정보다 120년 전에 있었던 중종반정은 연산군을 물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일면 수긍이 가는데 인조반정은 글쎄다. 인조반정은 정치사적으로 서인 쿠데타라 할 수 있다. 서인은 반정 전에는 동인에게 크게 밀리고, 광해군 때는 동인 일파인 북인이 권력을 독점하자 권력에서 소외당했다. 그런데 반정이 성공하면서 서인에 의한 권력 독점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들은 통치수단으로 예학을 동원해 법과 질서를 앞세움으로써 민간은 활력을 잃었으니 인조반정은 조선에서 가장 실패한 정변이 아닐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기자 admin@no1reelsite.com
탄금대 전투와 인조반정의 주역들
김정탁 노장사상가
충주에 가면 탄금대(彈琴臺)가 있다. 이곳은 송림으로 뒤덮인 기암절벽인데 남한강이 휘감으면서 흘러 경치가 빼어나다. 신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진흥왕 시절 여기서 조국 가야를 그리워하며 가야금을 연주하자 오묘한 음률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가야금(琴)을 뜯는(彈) 대로 명명되었 바다이야기프로그램 다. 그러니 가야인에게는 망국의 한이 서린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이 총력을 기울여 일본군의 북상을 여기서 저지코자 했으나 오히려 궤멸돼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는 빌미를 제공해 조선인에게는 한 많은 장소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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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 등거리 외교 등에 대한 불만 정변 명분 약해, 정치로 풀었어야 릴게임황금성
인조, 삼전도 굴욕 후 ‘친청’ 기울어 이괄 등 반란 주역, 또 반란 일으켜
권력에서 소외된 서인들의 반역 집권 후 예학 강조, 민간 활력 잃어 」
왜군에 패한 신립, 탄금대에서 몸 던져
탄금대의 열두대. 우 바다신게임 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탄금대 전투를 두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여전하다. 신립 원수가 탄금대 앞 달천평야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고 근처 조령의 길목을 지켰더라면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 때문이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후에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조령을 둘러보고 어째서 조령을 포기하고 허허벌판에서 싸웠는지 의아해했다. 신립은 자신의 장기인 기병전을 벌이기 위해 부원수 김여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를 배수진 삼아 달천평야에서 일전을 벌이다가 참패를 당했다. 결국에 두 사람은 탄금대에서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들의 아들 신경진(申景禛)과 김류(金瑬)는 30년 후에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역사의 무대에 화 손오공릴게임 려하게 등장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등극했는데 이때 반정 주역들이 내세운 명분은 선조의 젊은 계비 인목왕후의 폐모와 명·청 등거리외교에 대한 불만인데 이것들은 엄밀히 말해 왕을 폐위시킬만한 사안이 아니다. 이 정도의 반정 명분이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야당의 연이은 탄핵 공세로 계엄령을 발동했다는 주장과 어쩌면 흡사하다. 정치력으로 풀어야 할 사안을 무력으로 해결해서다. 게다가 폐모론을 주도한 사람은 광해군이 아니라 권신 이이첨인데 설령 광해군이 방관했다 해도 이이첨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지 이를 이유로 왕을 폐위시킨 건 누가 뭐라 해도 불충한 일이다.
탄금대의 탄금정. [사진 김정탁]
또 반정 세력들은 명·청 등거리외교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린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명이 기울고 후금이 강해지는 마당에선 광해군의 국제정세관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 때 명의 참전은 조선만 구한다기보다는 명이 일본과의 전쟁을 조선에서 벌인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궁극적인 목표가 조선을 거쳐서 명을 쳐 중국을 일본에 복속시키는 일이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한 대안도 없이 친명배금(親明拜金)의 기치를 내걸고 반정을 일으켰으니 결국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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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를 휘감으며 흐르는 남한강. 조선 장수 신립이 달천평야 전투에서 왜군에 패한 후 탄금대에서 몸을 던졌다. [사진 김정탁]
반면에 반정 주역들은 명분보다도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반정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후 이들의 행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먼저 인조 자신이 그러하다. 인조는 반정 주역들과 직접 반정을 모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왕으로 추대된 중종과는 입장이 크게 다르다. 그런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를 당하는 굴욕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는 자진해서 청나라로 기울었으니 이는 반정의 명분은 내팽개쳐도 왕위는 보존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조는 죽을 때까지 친청파의 좌장인 김자점(金自點)에게 권력을 10년 가까이 몰아줘 왕권을 유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인조는 청에 배신당할까 봐 순치제의 섭정왕인 도르곤의 신뢰를 받던 왕세자 소현세자와 그 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자신의 왕 자리를 대신할까 늘 걱정이었는데 권좌 유지를 위해 맏아들과 맏며느리를 죽게 하고 맏손자까지 죽게 했으니 가정적으로 가장 불행한 왕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친명배금의 명분은 놓고 싶지 않아 왕위를 이은 봉림대군에게 이 숙제를 맡겨 효종은 집권 내내 마음에 내키지 않는 북벌을 외쳐야 했다.
최명길·장유·이귀, 실리 외교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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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에서 바라다보이는 먼 산에 조령이 있다. [사진 김정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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