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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기자]
▲ 월송대. 충무공의 유체가 잠시 머물렀던 언덕이다. 바다쪽으로 눈물방울마냥 비쳐있는 형세다. 사진 오른쪽으로 공의 사당 충무사가 들어서 있다.
ⓒ 이병철
노화도를 떠나 완도 화흥 바다이야기게임 포항에 이른 때는 이미 오후였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기 무섭게 오토바이를 육지로 올렸다. 쉬지 않고 섬을 달렸다. 가을 해 역시 길지 않다. 신지대교를 건너고 장보고대교를 건너 고금도로 들었다. 섬 중앙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길을 따라 고금도와 묘당도를 잇는 간척지가 펼쳐진다. 시간은 10월 2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릴게임사이트간척지 끝에 완도 이순신기념관이 있었다. 넓은 주차장은 비어 있었다. 한 편에는 마을 노인인 듯 세 분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시끄럽고 시커먼 것을 노인들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뒤편 언덕 좁은 길을 넘어가니 바다가 보였다. 파도는 잔잔했고, 하얀 빛깔 방파제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묘당도 포 바다이야기온라인 구였다. 잘게 이는 물결을 보며 그날의 환영으로 잠시 빠져들어 간다.
'함안 두매실 놈 철승이는 진즉 모로 처박혀 있었다. 밤새 교대로 노를 저은 그의 손바닥은 새벽녘에 녹아 버렸다. 굳은살이 뜯겨나간 자리에 여물지 못한 속살이 터졌다. 피는 손에 감아 둔 해진 무명 끈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놈은 뽀빠이릴게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앙다문 이 사이로 쇳소리 섞인 숨만 몰아쉴 뿐. 난리 통에 아비를 잃고 어미와 누이는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노에서 놈을 억지로 떼어낸 것은 깨진 격벽 사이로 해가 어슴푸레 비칠 즈음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놈은 그대로 고꾸라져 미동도 없다. 포성의 진동은 멎었다. 염초가 떨어진 게다. 밤새 쏘 오션릴게임 아댔으니 그것도 바닥을 보였으리라. 노를 재촉하는 격군 대장의 호령은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포성에 묻혔던 다른 울림들이 밀려들었다. 비명, 쇠붙이가 엉기는 파열음, 총탄이 선체에 박히는 둔탁한 타격감. 그 각종 진동과 떨림은 갑판을 타고 내려와 노를 잡은 내 몸을 울렸다.
내 귀는 지난해 칠천량 바다에서 거의 멀었다. 패색이 짙던 순간, 우리 배의 우두머리 군관은 써보지도 못한 염초통에 불을 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파편에 의지해 해안으로 밀려난 뒤였다. 밤낮없이 미친놈처럼 서쪽으로 도망쳤다. 귀가 피떡인 것을 안 것은 열흘째 되던 밤, 순천에서였다.
매복해 있던 조선 병사가 산송장 꼴인 날 붙잡고 심문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핏대를 세우다 포기했다. 그리고 울돌목에서 다시 대장선 격군이 되었다. 웬일인지 사람들은 날 개똥아범이라 불렀다. 그날 이후 난 더 이상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다. 단 한 조각을 제외하고. 그 남은 조각은 통제사 영감에게 의탁했다.
잘린 적의 머리가 가끔 계단을 타고 격실까지 굴러 떨어졌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은 숨이 붙어 있는 작은 몸뚱이가 떨어졌다. 군관의 도끼가 즉시 그의 머리를 갈랐다. 끊기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독전고의 울림. 낮고 깊게 웅웅 거리는 북소리는 샘통에 물방울 떨어지듯 집요하게, 내 몸을 때리며 전해졌다.
노를 저으면서도, 숨을 고르면서도 그 울림을 놓친 적이 없다. 다만 조금 전, 잠시 그 맥이 끊겼다 되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창자 속이 뒤틀리듯 불길한 예감이 몸속 깊은 곳에서 끓었다.
몸을 울리던 모든 진동이 멎었다. 노 젓기를 재촉하던 군관도 입을 닫았다. 순간 이웃 배들로부터 함성이 터져 공기를 찢었다. 싸움이 끝난 모양이다. 함성은 떨림을 키우더니 온 바다를 채우며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로 머리 위 갑판만은 고요했다. 마치 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양 어떤 진동도 없었다. 오직 이 배만이 침묵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피와 숨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듯했다.'
▲ 묘당도 바다. 잔 파도조차 잘 일지 않는 고요한 바다다. 함대를 정박해 머물기에도 더할나위 없는 좋은 바다였을 것이다.
ⓒ 이병철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날아와 코끝을 스친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현실을 깨운다. 환영은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땅줄기가 보였다. 묘당도 명군의 주둔지였다. 명 제독 진린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1598년 7월이었다. 바닷길로 조금 떨어진 본섬 고금도 끝자락에 통제영을 두고 있던 충무공이 그를 영접했다. 진린은 상국의 장수답게 사나웠다.
그 사나움에 공의 강직함이 부딪힐까 조정은 근심했다. 공의 선택은 달랐다. 극진히 대접했고 진린의 마음을 살펴주었다. 그의 공을 위해 적의 수급을 아낌없이 넘겨주었다. 더 큰 뜻이 있던 공에게 소인배적 자존심은 무용했고, 적의 수급은, 줄 것 없던 우리 형편에 좋은 방편이 되었다. 더 심한 것도 했을 공이다. 반면, 왜군을 이롭게 하는 일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무과 제도의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 공은 임란 전에도, 임란 이후에도 철저하게 공적 인간으로 살았다. 임진년에 닥쳐 전라좌수사로 있던 그는 개전 초기 관할 구역조차 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부여받은 권한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권한 내에서 부여받은 임무에 대해서는 일절 망설임과 거침이 없었다. 그가 왜군을 깨 나가는 형세는 기계적으로도, 심지어 무심한 듯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편하지 않았다. 정유년 재란과 파직의 와중에 모친을 잃었다. 왜군에게 셋째 아들 면까지 목숨을 빼앗겼다. 그의 성정에 비추어,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문드러져 갔을 그의 속이었다. 울돌목의 승리는 이미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것이었고, 목포 고하도에서의 수군 재건은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 공은 명군과 함께 남해 일대에서 적을 맞는다.
바다를 향해 살짝 뻗은 좁은 땅을 가운데로 묘당도 포구는 좌우로 나뉘어 있다. 그 땅이 섬 쪽으로 연결된 언덕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가 자리한다. 하마비를 지나 홍살문부터 시작하는 사당은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을 거치게 된다. 각 영역이 한 층씩을 높여 독립된 단을 구성하고, 동무·서무 같은 부속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연청색과 붉은 주칠 위주인 각 건물들은 주변 맑은 공기에 더해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 새 한 마리 울지 않았다. 아니 내 귀에는 그 어떤 소음도 닿지 않았다.
▲ 충무사 내삼문. 내삼문을 지나면 공의 사당이 있고, 동무와 서무가 들어서 있다. 동무에는 노량해전에서 장군과 함께 순국한 이영남 장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한다.
ⓒ 이병철
원래 이곳은 진린이 주둔할 때 세운 관왕묘가 있던 자리다. 조선 시대를 거쳐 꾸준히 이어졌으나 일제에 들어 관우상은 물론 대부분의 기물이 바다에 던져졌다. 이 먼 곳까지 집요하게 찾아와 그리했다 하니, 참으로 악은 부지런했다. 그 자리에 해방 이후 사람들이 뜻을 모아 공의 사당을 건립했다. 경내 구석에 조선 숙종 때 세운 관왕묘비(사적비)가 자리하고 있어 그 옛 연원을 밝히고 있다.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
노량해전을 앞두고 공이 한 말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지난 세월의 무게를 이젠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던가 보다. 기계가 아닌, 무심이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 그는 그렇게 빌었다. 전투는 그의 기원처럼 격렬했을 것이다. 육지로 도망쳐 백성이 해을 입을까 싶어 일부러 퇴로를 열어주곤 하던 그였다. 노량에선 막다른 관음포로 왜군을 몰았다. 그는 적의 완전한 구축(驅逐)을 원했다. 절멸시키려 했다.
사당을 나와 정면, 바다로 뻗은 땅줄기를 따라 걸었다. 하마비를 지나 짧게 둔덕을 오르니 원형의 낮은 울타리가 보였다. 주위는 울창한 해송이 둘러싼 공터다. 그 안은 두텁게 솔잎이 깔려 있는데, 가운데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 땅이 한 자쯤 깊이로 긴 타원형을 띠고 있다. 그곳이 어떤 자리인지는 짐작하고도 남겠다.
월송대. 바다를 향해 눈물방울처럼 작고 봉긋이 솟은 언덕은 공의 유체가 가매장돼 있었던 곳이다. 기록에 따라서는 80여 일을 이곳에 계셨다고도 하지만, 안내석에는 이곳에서 열흘 동안 계신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의 그, 하지만 그 삶에 대해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또한 그와 함께 피 흘린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노량해전에선 공이 이끈 전투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 월송대 안내석.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유체가 임시로 안치되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 이병철
<난중일기>에는 그가 자주 대취(大醉)하곤 했던 것으로 나온다. 독주인 과하주(過夏酒)를 좋아한 것으로도 나온다. 하루 종일 뼈마디가 닳도록 일하고 독한 소주 한 잔 걸치던 우리네 사람들과도 겹쳐진다. 그도 사람일진대, 그 피비린내 나는 세월이 어찌 편했을까. 그래도 이곳 월송대에 누워 겨우 편하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카메라는 들지는 못했다.
고금대교를 건너 이제 육지로 올라왔다. 순천을 지나니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이다. 오토바이 전조등은 꺼질 듯 박했고, 바퀴가 땅을 긁으며 내는 진동만이 유일한 내 벗이었다. 나는 곧장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덧붙이는 글
▲ 월송대. 충무공의 유체가 잠시 머물렀던 언덕이다. 바다쪽으로 눈물방울마냥 비쳐있는 형세다. 사진 오른쪽으로 공의 사당 충무사가 들어서 있다.
ⓒ 이병철
노화도를 떠나 완도 화흥 바다이야기게임 포항에 이른 때는 이미 오후였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기 무섭게 오토바이를 육지로 올렸다. 쉬지 않고 섬을 달렸다. 가을 해 역시 길지 않다. 신지대교를 건너고 장보고대교를 건너 고금도로 들었다. 섬 중앙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길을 따라 고금도와 묘당도를 잇는 간척지가 펼쳐진다. 시간은 10월 29일 오후 3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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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두매실 놈 철승이는 진즉 모로 처박혀 있었다. 밤새 교대로 노를 저은 그의 손바닥은 새벽녘에 녹아 버렸다. 굳은살이 뜯겨나간 자리에 여물지 못한 속살이 터졌다. 피는 손에 감아 둔 해진 무명 끈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놈은 뽀빠이릴게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앙다문 이 사이로 쇳소리 섞인 숨만 몰아쉴 뿐. 난리 통에 아비를 잃고 어미와 누이는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노에서 놈을 억지로 떼어낸 것은 깨진 격벽 사이로 해가 어슴푸레 비칠 즈음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놈은 그대로 고꾸라져 미동도 없다. 포성의 진동은 멎었다. 염초가 떨어진 게다. 밤새 쏘 오션릴게임 아댔으니 그것도 바닥을 보였으리라. 노를 재촉하는 격군 대장의 호령은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포성에 묻혔던 다른 울림들이 밀려들었다. 비명, 쇠붙이가 엉기는 파열음, 총탄이 선체에 박히는 둔탁한 타격감. 그 각종 진동과 떨림은 갑판을 타고 내려와 노를 잡은 내 몸을 울렸다.
내 귀는 지난해 칠천량 바다에서 거의 멀었다. 패색이 짙던 순간, 우리 배의 우두머리 군관은 써보지도 못한 염초통에 불을 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파편에 의지해 해안으로 밀려난 뒤였다. 밤낮없이 미친놈처럼 서쪽으로 도망쳤다. 귀가 피떡인 것을 안 것은 열흘째 되던 밤, 순천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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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저으면서도, 숨을 고르면서도 그 울림을 놓친 적이 없다. 다만 조금 전, 잠시 그 맥이 끊겼다 되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창자 속이 뒤틀리듯 불길한 예감이 몸속 깊은 곳에서 끓었다.
몸을 울리던 모든 진동이 멎었다. 노 젓기를 재촉하던 군관도 입을 닫았다. 순간 이웃 배들로부터 함성이 터져 공기를 찢었다. 싸움이 끝난 모양이다. 함성은 떨림을 키우더니 온 바다를 채우며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로 머리 위 갑판만은 고요했다. 마치 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양 어떤 진동도 없었다. 오직 이 배만이 침묵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피와 숨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듯했다.'
▲ 묘당도 바다. 잔 파도조차 잘 일지 않는 고요한 바다다. 함대를 정박해 머물기에도 더할나위 없는 좋은 바다였을 것이다.
ⓒ 이병철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날아와 코끝을 스친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현실을 깨운다. 환영은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땅줄기가 보였다. 묘당도 명군의 주둔지였다. 명 제독 진린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1598년 7월이었다. 바닷길로 조금 떨어진 본섬 고금도 끝자락에 통제영을 두고 있던 충무공이 그를 영접했다. 진린은 상국의 장수답게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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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제도의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 공은 임란 전에도, 임란 이후에도 철저하게 공적 인간으로 살았다. 임진년에 닥쳐 전라좌수사로 있던 그는 개전 초기 관할 구역조차 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부여받은 권한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권한 내에서 부여받은 임무에 대해서는 일절 망설임과 거침이 없었다. 그가 왜군을 깨 나가는 형세는 기계적으로도, 심지어 무심한 듯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편하지 않았다. 정유년 재란과 파직의 와중에 모친을 잃었다. 왜군에게 셋째 아들 면까지 목숨을 빼앗겼다. 그의 성정에 비추어,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문드러져 갔을 그의 속이었다. 울돌목의 승리는 이미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것이었고, 목포 고하도에서의 수군 재건은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 공은 명군과 함께 남해 일대에서 적을 맞는다.
바다를 향해 살짝 뻗은 좁은 땅을 가운데로 묘당도 포구는 좌우로 나뉘어 있다. 그 땅이 섬 쪽으로 연결된 언덕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가 자리한다. 하마비를 지나 홍살문부터 시작하는 사당은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을 거치게 된다. 각 영역이 한 층씩을 높여 독립된 단을 구성하고, 동무·서무 같은 부속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연청색과 붉은 주칠 위주인 각 건물들은 주변 맑은 공기에 더해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 새 한 마리 울지 않았다. 아니 내 귀에는 그 어떤 소음도 닿지 않았다.
▲ 충무사 내삼문. 내삼문을 지나면 공의 사당이 있고, 동무와 서무가 들어서 있다. 동무에는 노량해전에서 장군과 함께 순국한 이영남 장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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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은 진린이 주둔할 때 세운 관왕묘가 있던 자리다. 조선 시대를 거쳐 꾸준히 이어졌으나 일제에 들어 관우상은 물론 대부분의 기물이 바다에 던져졌다. 이 먼 곳까지 집요하게 찾아와 그리했다 하니, 참으로 악은 부지런했다. 그 자리에 해방 이후 사람들이 뜻을 모아 공의 사당을 건립했다. 경내 구석에 조선 숙종 때 세운 관왕묘비(사적비)가 자리하고 있어 그 옛 연원을 밝히고 있다.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
노량해전을 앞두고 공이 한 말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지난 세월의 무게를 이젠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던가 보다. 기계가 아닌, 무심이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 그는 그렇게 빌었다. 전투는 그의 기원처럼 격렬했을 것이다. 육지로 도망쳐 백성이 해을 입을까 싶어 일부러 퇴로를 열어주곤 하던 그였다. 노량에선 막다른 관음포로 왜군을 몰았다. 그는 적의 완전한 구축(驅逐)을 원했다. 절멸시키려 했다.
사당을 나와 정면, 바다로 뻗은 땅줄기를 따라 걸었다. 하마비를 지나 짧게 둔덕을 오르니 원형의 낮은 울타리가 보였다. 주위는 울창한 해송이 둘러싼 공터다. 그 안은 두텁게 솔잎이 깔려 있는데, 가운데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 땅이 한 자쯤 깊이로 긴 타원형을 띠고 있다. 그곳이 어떤 자리인지는 짐작하고도 남겠다.
월송대. 바다를 향해 눈물방울처럼 작고 봉긋이 솟은 언덕은 공의 유체가 가매장돼 있었던 곳이다. 기록에 따라서는 80여 일을 이곳에 계셨다고도 하지만, 안내석에는 이곳에서 열흘 동안 계신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의 그, 하지만 그 삶에 대해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또한 그와 함께 피 흘린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노량해전에선 공이 이끈 전투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 월송대 안내석.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유체가 임시로 안치되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 이병철
<난중일기>에는 그가 자주 대취(大醉)하곤 했던 것으로 나온다. 독주인 과하주(過夏酒)를 좋아한 것으로도 나온다. 하루 종일 뼈마디가 닳도록 일하고 독한 소주 한 잔 걸치던 우리네 사람들과도 겹쳐진다. 그도 사람일진대, 그 피비린내 나는 세월이 어찌 편했을까. 그래도 이곳 월송대에 누워 겨우 편하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카메라는 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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